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52> 체육인으로서 재미를 느끼니까 매진했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52> 체육인으로서 재미를 느끼니까 매진했다
  • 광양뉴스
  • 승인 2015.07.10 21:12
  • 호수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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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복 전라남도 축구협회 회장
서정복 전라남도 축구협회 회장

 1982년 필자가 근무하던 진상종합고등학교(현 한국항만물류고) 교내 체육대회에서 학생 수가 많지 않던 골약중학교 출신들이 씨름 선수로 돋보였다. ‘선생님, 저하고 씨름 한 번 할까요? 선생님보다 등치는 작아도 저를 넘어뜨리기 힘들 겁니다.’ 하며 장난을 걸어오던 아이도 골약중 출신이었다. 전남 대표 씨름 선수를 키워낸 중학교였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씨름 기술을 멋지게 발휘했다.

 그 씨름부 육성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서정복(67) 씨다. 사비를 들여 씨름장을 만들고 지도교사를 끌어왔으며 선수들을 먹이고 속옷까지 사다 입혔다. 젊은 열정과 애향심은 광양군 씨름협회 회장을 맡으며 체육인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여러 방면으로 활동했고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오로지 한 길을 꼽으라면 체육인이다.

축구를 통해 지역에 희망과 용기를!

 서정복 씨는 운동선수를 한 적은 없지만 경기인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역할의 중요성에 일찍 눈을 떴다. 청년시절이던 1970년대 골약면민 체육대회를 주도하면서 헬리콥터를 띄우고 꽃가루를 날리며 성대하게 치루면서부터 그랬다.

 1991년 동광양시의회 의원으로 진출하여 의장을 맡았고, 포스코 회장에게 프로축구단 창단과 커뮤니티센터 건립 두 가지를 제안했다. 김만제 회장은 받아들였고, 1994년 전남드래곤즈 축구단이 창단되었다.

 포스코에서는 서정복 씨에게 드래곤즈 단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당시 동광양시의회 의장으로서 보름간 답변을 하지 않고 고민했다. 무경험자가 신생 프로축구단의 운영 책임을 맡겠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래도 프로축구를 통해 지역사회에 새로운 꿈과 희망, 용기를 더할 수 있겠고, 스포츠가 시민정신을 결집하는 기능을 할 수 있겠다고 정리가 되어서 승낙을 했다.

 광양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도 힘이었다. 단장을 맡은 10여 년 동안 시와 포스코의 협력을 받아 축구 전용구장에 관중을 모으며 흥행을 이끌었다.

 축구가 삶의 중심에 우뚝하게 들어선 것이다. 내친 김에 광양에서 축구 꿈나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광양제철고등학교에 축구부를 창단하고 기영옥 감독을 영입하는데도 힘을 썼다.

 호남에서는 고등학생 전국 축구대회를 주관하는 곳이 없어서 4강 진출에 불이익을 겪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광양시에서‘백운기 고교 축구대회’를 열도록 산파 역할도 했다. 백운기고교축구대회는 전국 어느 대회보다 좋은 조건으로서 권위 있는 축구대회로 정착했다.

 2015년 제17회 백운기를 광양제철고가 2년 연속 차지한 것만 보아도 광양시 축구 선수 발굴과 체육인들의 활동 무대는 크게 넓어졌다. 이젠 광양시에 남녀 초, 중, 고 축구를 육성하는 학교가 모두 갖춰진 것도 기쁘다.

 올해 제주도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는 초, 중학교 남녀 축구 4팀이 모두 메달을 따서 대견했다. 광양중앙초등학교와 광영중학교의 여자축구는 동메달, 순천중앙초등학교와 광양제철중학교의 남자축구는 은메달이었다. 또한 광양여자고등학교가 여왕기 여자축구에서 우승을 했으니, 앞서 광양제철고등학교와 더불어 광양은 학생 축구의 본고장이다.

체육인이 지향해야 할 덕목

 서정복 씨의 활동에 따른 광양시의 축구 활성화는 여러 지역 축구인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에게 전라남도축구협회의 구심점을 요구했다. 그래서 전남축구협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15년째다. 전남체육회는 운영이사로 참여를 시작하여 부회장으로 활동력이 넓어졌는데, 2008년부터 사무처장을 4년간 맡게 되었다.

 사무처장은 상근을 하며 직업인으로서 역량을 발휘하여 전남의 체육활동을 두루 살펴야 한다. 당시는 도청이 무안 남악으로 옮긴 직후라서 체육회관을 짓는 일까지 겹쳤다. 새로운 회관을 단순한 사무 공간으로 채워서는 안 되겠다 싶어 스포츠과학센터를 더했다. 한국스포츠개발원을 축소한 형태로서 선수들의 체력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스포츠과학센터는 다른 시·도에는 없다.

 일꾼에게는 일이 겹치는 법인가. 2008년 가을은 전라남도가 31년 만에 유치한 전국체전을 여수시에서 진행하는 해였다. 사무처장이면서 부회장으로서 치러낸 전국체전은 하나의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은 성공적인 대회였다. 행사와는 다르게 사무처장으로서 전남체육진흥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체육인을 확대하고, 체육인재육성장학금을 13억 원이나 조성하여 경기인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사무처장을 마친 2012년은‘자랑스러운 전남인상’을 받았다. 다음 해에는 제51회‘대한민국 체육상 공로상(대통령상)’이 주어졌다. 일찍이 국민훈장 석류장까지 상훈을 받았지만 공로상은 정말 뿌듯했다.

 대한민국 체육상에서 호남 출신 경기인들이 본상은 많이 받았지만 체육인으로서 공로상은 호남인으로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상금 1,000만 원도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체육인재육성장학금으로 내 놓고, 땀 흘린 데 대한 인정과 보람만 누렸다.

 체육계에서 활동하다 보니 삶의 목표 설정이 뚜렷해졌다, 경기인은 목표로 선택한 운동 종목을 통해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도록 성숙해진다. 체육인이 지향해야 할 네 가지 덕목은 강인한 체력, 도전 정신, 사회성과 협동심, 승복하고 배려하는 인간애로 내세운다.

지역일꾼에게 남아 있는 아쉬움

 지금은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축구협회 감사를 맡고서 우리나라 체육을 살핀다. 축구협회의 전남 회장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대한축구협회에서 역할 하기는 어렵다. 처음 대한축구협회에 얼굴 내밀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축구계에 오래 몸담았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역의 경기인과 체육인들을 지원할 수 있는 영향력을 기쁘게 펼쳐간다. 기업의 대표이사가 된 뒤에도 월급의 대부분을 체육활동에 쓴 것으로 보이며, 필자가 5월 말 면담을 하려고 전화를 했을 때도 소년체전에 참가 중이었다.

 2012년엔 전남체육회 사무처장 4년을 마치고, 광양제철공단의 (주)성광기업 대표이사로 변신했다. 기업경영을 하면서 느끼는 포스코와 지역의 협력 문제는 다음 기회를 잡아 편하게 얘기를 하자고 미뤘다.

 (주)성광기업을 운영하면서 회사 조직도에서 근로자를 가장 위에 하고 대표이사를 가장 밑에 그려놓으며 군림하지 않았는데, 최근 노동조합원들이 다른 회사의 문제로 서울까지 가서 파업한 것을 따뜻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워한다.

 서정복 씨의 활동 중에 광양촌지원사업회가 특이하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중국 길림성 류하현 조선족진 광양촌을 지원하는 일이다. 필자가 광양중학교운영위원장이던 1998년 광양촌 소학교 및 중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으러 동행한 적이 있다. 해마다 찾아가는 민간교류였는데, 그동안 중국의 엄청난 변화와 이농현상으로 소학교와 중학교는 폐교되고 광양 후손들도 흩어져 사업의 지속 여부를 검토할 시점이라고 한다.

 정치인 서정복 씨의 활동은 면담 대상이 아닌 사항이다. 하지만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통합하여 오늘의 광양시가 되는데 기여한 것만은 언급하고 싶다.

 시·군 통합에 대한 1차 주민 여론조사에서 광양군은 통합을 원했지만 동광양시는 반대가 높았다. 통합 무산이라는 위기에서 서정복 씨는 광양이 미래로 가느냐 과거로 가느냐는 갈림길에 섰음을 감지했고, 마음속에 도사린 자신의 정치적 구도를 버렸다. 광양이 잠자던 농촌에서 깨어나 제철소와 광양항을 중심으로 새롭게 일어서도록 통합시에 찬성하는 길로 돌아섰던 것이다.

박두규 광양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