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50> 광양문인협회와 광양예술의 밑다짐 역할을 마무리하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50> 광양문인협회와 광양예술의 밑다짐 역할을 마무리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5.06.22 09:21
  • 호수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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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광양지부장 고정선

묘도분교의 첫인상은 영화‘내 마음의 풍금’에 나오는 정겹고 그리운 추억의 한 장면 같았다. 비조차 한 방울 두 방울 내려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시골 학교.

이곳이 바로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인연이 되어 근무하고 있는 광양문인협회 고정선지부장의 근무지이다. 아담한 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교무실에서 근황을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광양 문협 창립의 변

먼저 광양 문협의 창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직장 변동으로 광양에 첫 발을 딛었던 1990년도는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통합하기 전이었다. 이후 통합 전과 통합 후가 확연히 갈리는, 문학이라는 공감대로 지역의 정서를 하나로 묶기에는 진통이 많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초대 문인협회지부장을 맡아서 회원을 모으고 회지를 내고 문학의 밤, 시화전 등을 개최하였다.

당시에는 등단한 작가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으니 회원 모집도 쉽지 않았고 광양군에는 독서동호회 정도의 모임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열악한 현실에서 다행히도 깨어 있는 문화 의식을 가진 회원들이 있었다. 지역 여건상 신생도시, 산업단지라 이입 인구가 많기 때문에 지방문화가 알차게 형성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지역의 힘이 되고 삶의 원천적 뿌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중심으로 광양 문협을 만들게 된 것이다.

“지역을 하나의 공감대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공감, 그 중에서도 특히 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심적 공감대의 형성이 이루어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지요.”
꼼꼼하게 준비한 인터뷰 자료 중에 동광양문학의 창간 발간사가 있었다. 이것을 보면 고정선지부장이 당시 문인협회를 만들면서 가졌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태어난 동광양 문협.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해올 때마다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은 똑같았다. 문학이 그 시대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의 집약이며, 그 시대의 역사적 사명과 과제에 대한 종교적 깨달음에 견줄만한 각성의 집약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삶의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이 곳 사람들에게 잔잔한 전율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학적 고향을 제공해 주는 것도 우리 회원들의 큰 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문학 활동을 위한 지역작가의 자세

어느 지역이건 예술이 지역사회의 현안에 앞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지금까지 유명한 도시치고 예술이 불모지인 곳은 없었다. 오히려 예술로 인해 그 유명세를 더하고 했던 것이다. 특히 광양시는 2000년대 미래 해양도시의 주역으로서 역할이 기대되지만, 산업 발달과 소득 향상으로 도시의 부가적 반사 이익이 지대한 만큼 염려되는 점도 많다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기 전에 선별하는 눈이 필요해요. 우리 문화 예술이 터를 잡아야 하고 그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여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첫 번째가 문학을 하는 우리 회원들의 자세가 중요하겠지요. 롤랑 바르뜨는‘글 쓴다는 동사는 자동사이다.’라는 예의 명제 하나로 글 쓰는 자세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얘기하고 있어요. 문학의 사명이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물음을 묻는 것일 때 김수영의‘시는 온 몸으로 바로 온 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다.’라는 구절과 맥이 통한다고 보여 지지요. 문학작품의 작업 정신을 우리는 절실히 깨닫고,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메꾸는 데 노력해야 해요.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다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참해서 이 지역의 문화 예술적 토양에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활동을 위한 모든 것은 재정적인 문제를 수반하며,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공동의 작업이 아니라 개인의 작업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도 작가가 느끼는 자존심의 문제일 거예요.

지역 기업이 이익의 일정 액수를 문화예술기금으로 축적시켜 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모든 예술 활동을 후원해 줄 수 있는 광양시 문화예술기금의 조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단, 주는 자나 받는 자나 공정하고 정당하게 집행하여 개인의 사욕이나 명예를 돋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전제는 말 할 것도 없지요.”

광양예총 기반 조성에 앞장…지금까지 변화 모습을 보면서

1990년도에 광양 문협을 먼저 만들어 활동하고 있을 때 광양 출신의 미술작가와 음악가를 중심으로 각 분야가 망라된 예총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직 젊은 친구들이었고 의욕도 높았지만 실제로 예총활동을 해 본 경험이 없는 탓에 목포에서 여러 해 동안 활동을 한 그에게 자연스럽게 자문을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세상을 달리 하셨지만 그 때 고향 사랑이 철철 넘치시던 김재훤 선배님이나 주동후 소설가 같은 분들이 옆에서 많이 격려해 주신 힘도 잊을 수는 없다.

지부 조직부터 초대 예총회장 인선까지 일일이 말로하기에는 쉽지 않다. 예총지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 지부마다 중앙에 등록된 일정 수의 회원이 있어야 했는데 광양시는 문인협회를 제외하고는 그런 여건이 안 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문인협회, 국악협회, 미술협회가 구성 요건을 맞춰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광양지회가 정식으로 창립하게 되어 광영에 사무실도 얻고 담헌 전명옥의 제자를 받아 현판도 걸게 되었다.

그 후 사진, 음악, 연극, 연예인협회가 생겨 명실상부한 광양예총으로 성장했음을 볼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한다. 초대 광양예총 회장을 모시는데도 말할 수 없는 애로가 많았다. 초창기의 경제적인 부담을 가져야 하는 명예직일 뿐인 자리를 누가 선뜻 나서려 하겠는가?
 

조선대 미술과를 나와 한진 광양소장을 하던 유 진 회장을 목포대 박석규 교수로부터 소개받아 삼고초려 끝에 회장으로 모실 수 있었다. 이렇게 자리매김 후 고향을 떠나 활동하던 많은 예술인들이 다시 돌아와 각 지부가 점점 활발해진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광양예총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지부마다 나름대로의 사정으로 사람이 모이다보니 시끄러운 것도 당연한 것.

따라서 지역 사람들이 아닌 외부 사람들이 초창기에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밑다짐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세로 보고 있었는지 냉정하고 겸허하게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하고, 예총에 대한 불만보다는 협조적인 자세로 함께 손잡고 갔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또 사라실 예술촌의 경우도 아직은 우리 광양의 예술 활동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앞서가고 있지 못한 입장에서, 너무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면만 따져서도 안 된다고 피력했다. 예술에 대한 투자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예술의 질은 그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퇴임 후 생활과 앞으로의 작품 생활

고정선 지부장은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 하고 2014년에 퇴직했다. 퇴직이후 광양에서 가까운 묘도분교장에서 12명의 아이들과 3분의 선생님들을 도와주고 있다. 원래 분교생활에 익숙해서인지 엄청 행복하다면서 할 수만 있다면 계속하고 싶다고 한다.

2015년을 끝으로 광양 문협 지부장의 임기도 끝난다. 그는 한 지부를 맡으면서 창간사를 두 번이나 썼다. 동광양시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 동광양문학을 창간하면서 썼고, 동광양시가 광양시로 통합하면서 문인협회도 광양시 문인협회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을 때다. 이름을 ‘광양문학’으로 바꾸었고 연이어 지부장을 맡아 창간사를 또 쓴 것이다.

초창기에 지부장만 7년을 하여서 장기 독재라는 말이 붙었었다. 직장을 옮기면서 고흥으로 외유를 나갔다가 돌아와서 그동안 느슨해진 회의 조직을 재도약 시키고자 또 4년의 임기를 맡았다.

올해 임기를 마치게 되면 장장 11년이라는 지부장 장기 독재를 하게 되는 셈이다. 그래도 특유의 카리스마와 정확한 일 처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광양문협이 이만큼 성장하는 데 혁혁한  디딤돌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이의를 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글 쓰는 일보다는 행정적인 면에 더 많은 신경을 쓴 것 같아 이젠 하나씩 정리를 하고 열성을 다해 글쓰기 작업만 해 보고 싶다고 한다.

현재 맡고 있는 광양예총의 부회장 자리도 1년 정도 남았으니 뒤에서 밀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별밭문학회’라는 동인의 회장이야 어쩔 수 없이 계속 한다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다 놓는 방향으로 마음의 정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돌아가신 주동후 선배님이나 김재훤 선배님께서‘광양의 문기를 일으켜 달라.’ 하신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는데, 그 분들의 뜻에 맞게 반이라도 해 놓고 물러서는지 모르겠지만 후배들이 의욕적으로 잘하고 있으니 믿어도 될 것 같네요.”

고정선지부장은 2015년 제25회 순리상 기록상을 받았다. 고흥의 백일분교장에서 근무하면서 쓴‘분교일기’가 추천된 것이다. 그는 1986년 아동문예에‘미술 시간’외 4편이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첫 동시집‘먹장구름 심술보’를 냈고, 퇴직하면서‘풀밭에는 왕따가 없다’로 제2 동시집을 상재했다.

2001년도에 초대 광양예술상 본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많은 작품 발표와 전남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초창기‘시·울림’이라는 동인지를 만들었다. 아직도 건강하게 왕성한 문필활동과 교직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한 2년 후의 내 글들을 기대해보는 고마움을 베풀어주기 바란다.” 고 부탁하고 있다.
 “비워놔야 뭔가 채워져도 채워지지 않겠는가? 하하하.”…….

뭔가 빈 곳을 채울 엄청난 작업을 할 모양이다.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 주고 뒤로 물러 앉아 있을 고정선 지부장의 빈자리가 벌써부터 커 보인다.  

박옥경(광양문화연구회원, 광양문인협회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