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49> 광양문화와 향토정신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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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15.06.12 21:33
  • 호수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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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석 광양문화원장을 찾아서

 

김휘석 광양문화원장

“문화는 삶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는 문화시대에 살면서 세계인과 한 가족으로 인류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 할 책무를 지닌다. 지방 문화원은 전통문화예술의 발굴과 육성, 문화예술교육 기회의 제공, 문화자원의 확보와 활용에 앞장서 온 지역문화발전의 주역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지방 문화원이 해야 할 책무성에 대해 쓴 <문화비전 선언> 첫 머리에 등장하는 말이다. 90년대 이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경제적으로도 선진국 초입에 들어서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부쩍‘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각 지역마다 평생교육관, 여성문화회관, 노인복지회관 등의 평생교육기관이 들어서고, 백화점이나 평생교육기관을 통해서 다양한 유형의 문화교실이 날마다 열리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인 것이다.

 지난 일 년‘광양문화연구회’는 7명의 필자가 참여하여 광양에 살고 있는 다양한 문화인물을 만나서 인터뷰해 왔다. 삶의 방식, 가치관 그 사회가 만들어 낸 모든 산물이 문화라고 할 때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광양인으로 살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보고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제 필자의 마지막 인터뷰 대상자는 지난 반세기 우리 고장 광양의 문화를 발굴하고, 전통문화 보존에 힘쓰고 있는 광양문화원의 제14대 수장‘김휘석’원장이다.
광양문화원은 구 광양군청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광양군청 청사는 근대문화유산 제444호에 등록되어 있는 일본식 이층 건물이다. 광양군청에서 광양읍사무소로 그리고 리모델링 후 광양문화원과 역사관으로 변모하여 왔다. 일제강점기의 전형적인 관공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700여 년간 광양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는 게 문화재청의 지정이유다.

 일제강점기, 여순반란사건 등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굵직한 사건을 문화원 옆 수령 400년 된 은행나무와 함께 말없이 지켜보아 온 셈이다.

 광양문화원은 1965년 1월 26일 문공부 사단법인 등록 이후 지난 해 5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문화원장을 역임한 분은 단 5명. 짧게는 3년, 길게는 무려 25년 동안 역임하신 분도 있다. 김휘석 원장은 2013년 4월 1일 제14대 광양문화원장으로서의 임기를 시작한 이후 의결기관인 이사회의 임원을 30여 명으로 늘리고 이사의 연간 회비 20만원 이상, 일반회원의 연간 회비를 4만원으로 정하였다.

 10억을 목표로 기금을 마련하고 그 기금을 바탕으로 지역문화 발전에 힘쓰고 있는 데, 이는 전국 220여개 문화원 중에서 처음 시도하는 사업이다.

 


전 광양시농업기술센터장, 해박한 농업전문가이자 아이디어맨

  그는 간단한 약력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여기서는 개인‘김휘석’이라기보다는 문화원장으로서 만나기에‘문화원’이야기만 하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문화에 대해서는‘돌팔이’라는 말로 낮추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결과이기에 여기서 잠깐 그의 삶의 이력을 엿보기로 하자. 그는 36년 8개월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지난 2007년 퇴임했다. 공직자로서의 그의 마지막 직책은 광양시농업기술센터장이었다.

 재직 당시 그는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농업전문가이자 반짝이는 아이디어맨으로 통했다. 쌀 중심의 농업환경을 바꾸어 매실, 단감, 배, 밤, 표고 등 경쟁력 있는 소득작물에 친환경농업을 접목시켜 체계화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근면하고 청렴했으며 소신있게 행정을 이끈 사람이라는 주위의 평이다.

 “문화원 기구 중 향토문화연구소가 있습니다. 지방 중에서는 천안이나 울산이 연구활동이 활발한 편인데 대부분의 향토문화연구는 지방자치단체가 대학에 의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광양은 문화원이 직접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인재들이 그 일을 해야 가장 정확하게 잘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정회기 불문학 박사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직업으로 <광양시지> 수정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1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인데 그 분들의 행보에 시민들의 기대가 큽니다. 지역의 문화발전에 많은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15년만의 부활 백운문예제, 향토자료관 건립이 시급해

 

 문화원은 김원장의 취임 이후 광양역사문화관 관리 운영, 연중 문화교실 운영, 정월대보름과 팔월한가위 세시풍속축제, 문화탐방(연 6회), 청소년 문화유적 답사, 형제의병장 제례, 거리음악회 등의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그 중 백운문예제의 부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백운문예제는 1975년부터 초중고를 대상으로 시, 산문, 미술 분야를 아우르는 백일장대회이다.

 중간에 끊긴 것을 다시 되살려 작년에 제24회 백운문예제를 개최하였다. 무려 15년만의 일이다. 백운문예제는 연중 학교를 통해 시, 산문, 독후감 작품을 공모한 후 매년 11월에 시상을 한다. 대상은 문화원장상과 함께 상금 30만원이 주어진다. 상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시장, 교육장과 의견 조율중이다.

 “예전에는 유당공원에 모여서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대회가 끝나면 백운문예제 수상작품집도 발간하였지요. 그런데 남아있는 자료가 몇 권 안 됩니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도 작년에 자료 찾을 때 어렵게 찾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보관 장소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문화원장실이 없습니다. 작년에 자료 모으다가 문화원장실을 향토자료관으로 바꾸었지요. 문화원 사무실 소파가 제 집무실인 셈입니다.”

 광양은 문서고는 있는데 자료관이 없다. 시청이나 문화원에서 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한 자료를 어마어마하게 발간하고 있는데 정작 모아서 관리하는 곳이 없는 것이다. 지금 만드는 자료 하나하나가 후대에 의미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김원장은 자료관이 없는 것을 특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역에 관련된 자료를 하나씩 찾고 관리하는 일이야말로 문화원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긴다. 작년에 근현대 인물 관련 자료를 모을 때는 헌책방을 뒤져 사 모았다. 또 회원보유분도 기증받았다.

 강호무, 안영, 주동후 선생 외에 광양의 이름없는 작가들의 작품도 수집했다. 광양은 다른 지방에 비해 향토자료가 미흡한 편이다.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보유자료를 맡겨주면 좋겠다고 그는 말한다. 일례로 그는 우리 지역이 낳은 대표작가 정채봉, 김승옥, 이균영을 들었다.

 “그 분들의 작품이 도서관에도 제대로 비치가 안 되어 있습니다. 금년에는 예산을 세워 그분들이 남긴 전 작품을 사서 비치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문화원 내에 보관 장소가 마땅치 않습니다. 문화원이 자리를 잡고 사업을 다각화하려면 독립원사는 꼭 필요한 사업입니다.”

 광양역사문화관 건물 1층에는 광양역사관, 전시실, 문화원 사무실이 있고, 2층은 붓글씨, 인문학, 습식수채화, 시조, 서예, 가곡, 인형극 등의 문화교실이 열리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원이 학교 밖 교육기관임을 생각하면 더 하고 싶어도 공간이 좁아서 할 수 없는 지금의 형편은 독립원사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문화원 뒤에 있는 시장관사와 주변 건물은 역사문화관 부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이 부지에 100석 규모의 공연장, 그리고 정채봉, 김승옥 기념관을 지으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정채봉 미망인이 그러더군요. 순천의‘정채봉 문학관’에 가지고 있는 자료의 1/3을 기증했는데, 광양에서 지으면 남은 2/3를 기증하겠다고요. 광양의 인물인데 타 지역에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몇 있습니다. 매천 황현선생은 구례가, 도선국사는 그 분이 35년을 기거한 광양보다는 영암이 더 활발하게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근현대사 인물 조사, 장달막ㆍ황호일ㆍ김오천을 광양의 대표인물로 뽑고 싶어

 

 작년 문화원이 벌인 사업 중 눈에 띄는 사업으로 근현대사 인물 사료 조사가 있다. 현재까지 대학교수, 기업CEO, 지방시장이나 군수, 사회사업가 등 사회각층에서 활동했거나 하고 있는 인물을 80여 명 조사하였다.

 “우리 광양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큰 인물이 별로 없었습니다. 고려 조정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김황원, 광양옥룡 출신의 이무방, 그리고 조선시대의 신재 최산두, 매천 황현 외에는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경북도지사, 국회의원 4선, 법무부장관을 지낸 진월 장재마을 출신의 조재천, 장관을 지낸 광양읍의 김종호, 네팔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 주는 등의 사회사업을 펼친 김명호 등 엄청나게 많은 인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분들의 행적 하나하나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누구도 하지 않았던 작업을 묵묵히,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 그가 뽑은 광양의 대표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첫째로 뽑은 인물은 옥룡 밤실 출신의 ‘장달막’이다. 조실부모한 그녀는 서울로 상경하여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였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옥룡북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데 아낌없이 희사하였다.  관내 초등학교에 악기를 구입해주고, 마을을 위해서는 도로를 포장해주는 일을 했다.

 그가 뽑은 광양의 두 번째 인물은 진상면 출신의‘황호일’이다. 결혼 후 만주에서 일하다 내려온 후 벌교서 주물공장을 운영했다. 진상중학교를 설립했는데 중간에 학교에 불이 나고 말았다. 이후 학교를 다시 설립하였다. 현재 진상중고등학교 총동문회에서는‘황호일 현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가 뽑은 세 번째 인물은 오늘의 다압청매실농원을 건설한‘김오천’영감이다. 10대에 남의 집 머슴살이하며 모은 세경을 가지고 일본 후쿠오카 탄광으로 일하러 갔다. 거기서 돈을 벌어서 돌아올 때 밤나무와 매실나무를 가지고 왔는데, 이후 광양밤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재배지를 갖게 되었으며 매실은 광양농가의 소득창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남을 위해 뭔가를 해 주면 댓가를 바라는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요. 정치가는 표를 원하고, 고관대작은 명예를 원합니다. 그러나 위 세 사람은 지역민들에게 아무 것도 바란 것이 없습니다. 기꺼이 광양의 대표 인물이 될 만합니다.”


지역민에 대한 AS로 소임을 다하고파

“현 문화원장의 임기는 4년입니다. 저는 절대 중임은 하지 않는다고 취임하면서 선포하였습니다. 40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퇴임사에서 저는 지역민에 대한 AS를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일부나마 지키는 자리가 바로 문화원장의 자리입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역과 지역민에 대한 봉사를 꾸준히 할 예정입니다.”

 너털웃음과 함께 구수하게 풀어내는 광양사투리가 정겹다. 문화에 대한 확고한 소신으로 무소의 뿔처럼 전진하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가 문화원장이라서 광양시민인 게 든든한 오늘이다.

양선례 광양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