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48> 나의 삶과‘실로암 마을’이 하나였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48> 나의 삶과‘실로암 마을’이 하나였다!
  • 광양뉴스
  • 승인 2015.06.05 21:45
  • 호수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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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실로암마을 이경정 원장

20세기말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분립했다가 광양시로 통합됐지만 농촌사회인 군(郡) 단위의 행정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문화와 복지, 청소년과 여성을 대하는 행정 담당자의 태도에서 도시 행정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런 광양에‘실로암선교회 동전남지부’가 세워져 장애인을 위한 민간공동체 활동을 열었고, 2000년‘사단법인 실로암 마을’로 전환되어 전문적인 장애인 복지서비스를 수행하였다. 도시 행정의 걸음마가 시작된 것이다.

필자에게 당시의 장애인 활동을 알리는 현수막조차 신선했다. 그리고 실로암에서 일하던 이경정(47) 간사의 해맑은 웃음이 선연하다. 그 뒤로 강산은 변하여도 이경정 씨는 여전히 실로암마을에서 일하고 있다. 근무조건이 열악한 사회복지 시설에서 장기 근무하는 분들을 찾아보기가 힘든데, 17년째 변함없는 이경정 씨.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장애인 재가복지에 청춘을 바치다

실로암 간사로 부름받기는 1999년이다. 그 전 5년간은 순천에 사무실이 있는 어린이전도협회 간사로서 기독교 교사 교육에 전념했다. 그런데 교회 목사님의 설교 중에 장애인을 제대로 돌봐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을 울렸고 실로암으로 발길을 들여놓게 되었다. 대학 야간과정으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것도 실로암마을에 근무한 다음 해부터다.

초창기 실로암에는 봉사자가 줄을 이었고 지원도 많았다. 광양 유일의 복지시설이던 시절의 특수였다. 교회와 목사ㆍ장로님들께서 순수하게 적극적으로 도왔다. 포스코 직원은 물론 금호동 부덕사 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부들도 1주일에 한 번씩 점심을 해 와서 식사를 같이 했다. 그러다 운영 방식에 다른 생각들이 나타났고, ’06년 실로암 부설 건물인 매화원이 독립해 나가는 진통을 겪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매화원으로 가고, 빈손으로 새 출발하는 실로암마을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이사회는 ’08년부터 대표자인 원장을 맡으라 했고. 매화원과 분리된 후 사무실 공간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4번이나 이사를 했다.
 


교회 옆에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에서 어느 창고로 옮겼을 때는 빗물을 받아내야 했다. 지금은 20평 정도의 공간에서 사무실과 프로그램 진행을 하고 있지만, 해마다 바자회를 열어 자금을 모아가면서 땅을 구입하려고 한다. 그렇게 청춘을 바친 실로암마을과 그의 삶은 어느 덧 하나가 되었다.

장애인 이용시설로서 프로그램 이용자들은 청소년에서 장년까지 꾸준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응모 사업으로 지원받는 화요일 공예활동 프로그램에는 120명 정도 참여를 한다. 이용시설에서 나아가 주간보호까지 하고 싶었으나 광양시에서 지원을 하지 않는다. 주간보호소가 장애인종합복지관과 금호동 햇빛마을 둘뿐이기 때문에 보호 대상자들은 많은데도.

 


실로암마을과 교회 밖에 모른다

이러한 일을 이해하고 오래 근무하는 사람이 또 없을까? 이 원장보다 1년 먼저 실로암마을에 근무를 시작한 민수경(45) 사무국장이 있다. 장기 근속한 두 사람은 원장과 사무국장 관계지만, ’99년에 혼인을 한 부부다. 한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만난 두 사람은 마음이 통하여 혼인을 한 것이지만, 이들은 장애인들의 생활과 더불어 결혼한 것이라는 느낌이다.

아들 셋을 키우면서도 가정 때문에 심하게 싸우지는 않았다. 그런데 직장 일로 부부싸움을 많이 했다. 실로암마을에 대한 의견 차이가 충돌의 원인이었으므로 사무국장을 그만둔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로암마을을 위해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였으므로 일을 계속하자고 부탁했다. 원장에게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의견을 내면서 일을 책임지려는 열정을 가진 사무국장이 어디 쉽게 구해지겠는가.

토요일에도 자원봉사자들을 안내하여야 하므로 직원들은 쉬고 원장은 출근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의 장로로서 섬기는데 교회 차량 운전까지 맡았다. 다행히 중3, 초등6학년인 두 아들이 교회 찬양대에 동참한다.
그동안 삶의 이해자인 아내가‘당신은 직장과 교회밖에 모른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사회복지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똑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바칠 것이라고 여기며.

지난 봄, 모시고 지내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시자 며느리 노릇하느라 고생한 아내가 보였다. 또한 부부가 장애인 캠프도 가고 저녁 늦게 귀가를 하는 날들이 많았는데, 엄마와 아빠 노릇은 소홀했지 않았던가.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자식 노릇만 했었지, 가장 역할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떠올라 지금부터는 가정도 보살피며,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이 원장의 목표는 광양읍 주변의 500평 정도 땅에 건물을 마련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회복지가 크게 확장 발전하였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주어서 감사하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분들이 좀 더 비전을 가지고 사회복지에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일반적으로 기초수급대상자와 차상위계층에만 지원이 되는데, 거기에 포함되지 않고 손이 빠진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서 지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일은 자원봉사자로 이뤄간다

장애인들과 함께 하다보면 숱한 애환을 경험하게 된다. 3년 전 30명의 장애인으로 울릉도 캠프를 진행했다. 사전답사를 할 때 울릉군청 공무원들은 안 될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봉사자들이 계단과 높은 곳을 업어서 이동을 시키며 여행을 했다.

그러면서 장애인과 봉사자들은 더욱 정이 들었고, 날씨 때문에 독도를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울릉군청 공무원들은 놀라움을 표했고. 겨울이면 봉사단체와 함께 장애인 청소년들이 월등 눈썰매장에 가서 놀이를 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장애인 캠프를 제주도로 했을 때는 여수 공항에서 비행기로 이동을 했다. 당시 여수 공항은 활주로로 나가 계단을 통해서 탑승을 했는데, 탑승을 거부하는 장애인이 달아나 활주로로 잡으러 다니는 소동이 있었다.

비행기 타는 것을 겁먹은 장애인들은 비행기 안에서도 악을 쓰고 야단이었다. 동행하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해도 미안하기 그지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 장애인들의 활동을 이해하는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실로암마을은 봉사자 없으면 운영을 못한다. 행사를 할 때 장애인 1명에 봉사자가 1명, 여행할 때는 봉사자가 2명, 특별한 경우는 3명이 도와야 한다. 현재 일반 봉사자는 400명 정도며, 활동 보조서비스로 43명이 일한다. 활동 보조서비스는 ’07년부터 하는 지원 사업이고, 중증장애인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집안을 돌본다. 활동 보조서비스 참여자 중 15명은 처음부터 장기적으로 일하는데, 대상 장애인이 싫어하지 않는 한 끝까지 책임을 진다.

 


때로는 장애인에게 욕도 먹으면서 복지관, 영화관, 프로그램 장소로 이동까지 시킨다. 활동 보조서비스가 있어서 장애인들이 문화생활을 누리지만 봉사자들은 ‘현대판 가정부’처지다.
점심은 장애인이면 누구나 실로암마을에서 먹을 수 있다.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점심과 국을 중증장애인 집으로 배달한다. 배달 서비스 사업도 지원을 받으나 광진교회, 중동교회, 중마동 112자전거봉사대가 맡아서 광양읍, 옥룡면, 중마동, 광영동에 배달을 한다.
‘사랑의 물장구 봉사단’은 청소년문화센터 수영장에서 수영을 지도하고, ‘프롬스 봉사단’은 대중목욕탕에서 목욕 봉사를 맡아준다. 장애인과 봉사자들에게 동시에 보람을 주는 곳, 실로암마을!

우리나라 사회복지 서비스는 민간부문의 전달에 크게 의존해 왔다. 민간은 봉사정신으로 일하지만 재정이 모자라는 애로가 크다. 실로암마을도 그러한데, 장애인들의 재가복지와 생활시설의 이용을 확대하기 위하여 정부와 지역사회의 제도적인 지원이 늘어야 하겠다.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하는 길이니까.

광양문화연구회 박두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