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34〕 나를 살게 하는 분재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34〕 나를 살게 하는 분재
  • 광양뉴스
  • 승인 2015.02.13 21:33
  • 호수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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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분재 인생 강건호 씨

 


강건호(69세)씨에게 분재는 삶이다. 1974년 분재를 시작하였으니 올해로 41년째. 누군들 삶의 우여곡절이 없을까만 분재는 유독 곡절 많은 그의 생을 지탱해준 버팀목이다.

별로 이룬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다고 손 사레를 치는 강건호씨. 그러나 사 십 여년, 한 곳에 열정을 쏟았으니 왜 얘깃거리가 없겠느냐며, 그 이야기만 듣고 가겠노라고 청(請)을 하였다.

봉강면 지곡리. 6년 전, 이 자리에 천막하나 달랑 치고 들어 왔을 때, 4월 못자리에서 들리던 개구리 울음소리를 잊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작은 비닐하우스 3개동, 큰 비닐하우스 1개동에 배양장과 전시장을 갖추고 있는데 전시장에는 각종 분재와 수석, 난실에는 석곡이 빼곡하다.

 

 


“분재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분재를 통해 살아났다고 한다. 한 번은 1974년, 제대를 한 후에 심한 위장병이 생겼다. 순천의 한 병원엘 다녔는데 두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병원 원장이‘저 뒤’에 가서 담배나 두어 대 태우고 오라고 하였다. 그 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화분들이 가득하였다. 원장이, “당신 병(病)은 신경성이라 약으로 치료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우선 마음을 달래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고 하였다.

그 때 그 곳에서 보았던 책 한 권을 어렵사리 구하여 지금도 책꽂이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부록으로 딸려 나온 그 책을 얻기 위해 상당히 비싼 책 한 질을 덤으로 샀다고 하니, 순간의 만남이 그의 삶을 결정지어버린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분재 애호가나 길잡이가 거의 없다시피 할 때여서, 그 책은 그에게 스승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분재목(盆栽木)을 구하려고 산에 올랐다가, 일행 중에 한 명이 급류에 휩쓸려 버들강아지 가지를 붙들고 살아난 일도 있었다. 그렇게 한 오 년, 분재에 미쳐 살다보니 눈이 조금 열리더라고 하였다.

자연 상태의 나무가 분재로 잘 자라려면 우선 환경이 자연 상태와 비슷해야 한다. 서식지의 기호나 기운 등이 자연 상태의 여건과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분재에 적합한 수종은 모양을 내려고 가지를 다듬을 때, 새살이 잘 차올라‘이쁜 옹이’가 생기고, 적합하지 않은 수종은 옹이가 잘 되지 않고 타들어 가버린다고 한다.

봄이면 싹을 틔우고, 여름이면 무성하게 잎을 내어놓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면 나목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분재는 사계절의 즐거운 변화를 작은 분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다. 모아심기(붙여심기)와 돌붙임 분재가 있는데, 말 그대로 모아심기는 나무 몇 그루를 3,5,7,9, 홀수로 모아서 심는 방법이고, 돌붙임은 영원히 변치 않는 돌에 나무를 붙임하는 방법이다. 두 가지 방법 다‘마음에 심어진 풍경’을 분(盆) 위에 표현하는 것이다.

 

 

 

 

 


“분재는 자연을 잘 읽어야 합니다"
자연을 잘 읽는 사람이 분재의 수형을 잘 잡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분재목(盆栽木)은 옛 마을을 닮아 있다고 한다. 마을은 산을 기대고 생겨나는데, 산에 포옥 들러 싸인 마을처럼 전면(前面)은 살짝 굽어져 들어가 있고, 후면(後面)은 짱구머리처럼 톡 볼가져야 한다.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율동미(律動美)있는 선(線)을 넣어가야 한다.

좋은 분재는 자연스럽고 고목다운 운치가 풍겨야 한다. 오래된 나무가 주는 운치를 느끼려면, 분재를 가꾸는 이의 창작성이 가미되어야 하는데 오랜 시간과 정성, 미적인 안목, 소재와의 교감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분재는 시간의 예술이며, 회화나 조각 못지않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다루어져야하는 것이다.

분재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어 한반도,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고려 중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분중육영(盆中六詠)이라는 시, 조선 세조때 양화소록(養花小綠)이라는 책에 분재가 자세히 소개되었으며, 강희안은 노송도를 그려 분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서유구라는 사람은 분재를 감상하노라면 언덕이나 산봉우리 위에 올라앉은 듯 하여 여름 더위도 잊을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랑방 탁자 위나 서재의 책상머리, 문갑 위에서 자연의 오묘함을 드러내 주던 분재.

 

 

 


두 번째 그와 분재의 인연은 조금 아픈 사연이 있다. 하던 일에 실패하고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한 그는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다.‘구멍마다 물이 나오더라’고 했다. 화장지 한 통을 다 썼을 정도로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고 나니, 손바닥만 한 작은 분(盆)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아, 이 작은 나무도 주인이 주는 물 한 모금에 의지해 이렇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하물며 사람인 내가!’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게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다고 한다.

마침 전시실 안에는 노란 영춘화(迎春花)와 여왕꽃이라 불린다는 명자나무 꽃이 붉게 피어 있다. 한 겨울 추위 속에 피어난 꽃이라 더 황홀하다. 소사나무 고목은 금오도 비렁길의 한가로움을 떠올리게 하고, 깎아지른 절벽 위 낙락장송은 고고한 기품을 느끼게 한다.

야트막하게 벋어 올라간 소나무는 형제봉 정상쯤에서 보았던 멋드러진 그 나무와 닮아 있다.

옛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분재들이 감상실 안에 즐비하다. 그러나 강씨는 정말 작품다운 작품은 분(盆) 하나 밖에 없다며 겸손해하였다. 혹시 예전 작품들을 사진으로 남겨두신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 작업을 하지 못하였다고 애석해 했다.

강건호씨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품종을 자랑하는 한국의 마삭줄을 수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잠시 보류된 상태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작은 분재화분을 판매하려는 준비도 하고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1990년, 도민체전에 분재를 전시 하였다, 당시 도지사가 군수를 칭찬하였고, 기분이 좋아진 군수는 강씨에게 표창장을 주었다. 강씨는 지원금 대신 지역사람들이 분재를 감상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렇게 열린 분재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호사가들만 찾는 죽은 전시회 대신 문턱 없는 볼거리장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분재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꾸몄으나 꾸밈의 티를 내지 않는 자연스러움. 자연과 함께 하는 여유로움. 그의 분재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자연 사랑과 생명존중은 너무나 당연한, 그러나 절실하게 터득한 분재의 가르침이다.

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