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33> 장인ㆍ시민ㆍ행정의 삼박자가 맞아야지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33> 장인ㆍ시민ㆍ행정의 삼박자가 맞아야지
  • 광양뉴스
  • 승인 2015.02.0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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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장도박물관 박종군 장도장

 

광양시 경제에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을 광양제철소로 꼽는다면, 전통문화로서 가장 먼저 손꼽을 것은 장도박물관이 아닐까.

제철소와 장도는 쇳물을 녹이는 공정을 공통적으로 포함한다. 광양제철소의 용광로는 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세계적인 규모의 것이지만 장도박물관은 화로 같은 기구에서 손으로 작업한다. 천양지차,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박종군(54) 장도장은 역사에 남는 것은 문화일 뿐, 산업은 일시적이라고 단언한다.

문화에서 지역의 긍지를 찾아야 하며, 더구나 장도는 정신문화 아니냐고 되묻는다. 장도박물관과 장도장, 광양의 대표 문화로서 대한민국 명품이 틀림없다.

필자와 대담하는 중에도 서울의 중앙방송에서 박종군 장도장에게 전화가 왔다. 방송 나간다고 먹고사는 것이 아니므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광양 사람들도 장도박물관이나 박종군 장도장은 언론을 통해서 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언론보다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더 반기는,‘국가 무형 문화유산’의 얘기에 귀 기울여보자.

장인정신을 지켜가는 가문  

광양 장도장은 2014년 세상을 떠나신 박용기 씨부터 이름이 났다. 그는 1978년 장도장이 중요무형문화재 신규종목으로 지정되면서 보유자로 인정받아 문화의 불모지인 광양의 문화유산으로 우뚝 빛을 냈다.

2005년에는 광양시에 자신의 장도 공방과 재산을 기부채납하고 꿈꾸던 장도박물관을 세웠다. 하지만 고령이어서 장도박물관의 실제 운영은 아들인 박종군 씨의 몫이었다.

박종군 씨는 2011년 문화재법이 바뀌어서 스승과 전수자가 동시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아버지와 함께 제60호 문화재가 되자 비로소 효도한 보람을 느꼈다. 이렇게 평생을 준비하여 국가의 인정을 받아 계승한 만큼 아버지 떠난 빈자리를 느낄 수 없도록 박종군 씨가 모든 것을 채우고 있다.

박종군 씨는 아버지가 공예기술이 뛰어난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듯이 고등학교 때 미술부를 하면서 장도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장도 기술 배우기가 힘들어서 오히려 도전할 의지가 생겼고 대학 공부도 가업을 이어가는 방향으로 정했다.

그리고 30여 년을 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었다. 아내 정윤숙 씨와 큰 아들 박남중 씨도 아버지의 제자로서 공예기술의 경지에 올랐다. 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2개나 받은 박남중 씨는 6월 군대에서 제대를 하면 대학에 복학하여 계속 공부할 것이다.

이젠 박종군의 제자를 키워야 할 때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이 첫 제자가 될 것으로 예감을 한다. 고등학교 2학년인 박건영, 공부할 방향을 미술로 삼았으므로 피가 통한다. 두 아들이 장도문화를 이어받아 형제간에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장도장 3대를 이어가기 바란다. 장도의 기술은 기본이고 정신까지 가르쳐야 하리라.

 

전통문화를 가꾸는 협력관계

장도의 중심은 충, 효, 의, 지조의 정신이며 아름다운 예술성을 바탕으로 삼는다. 기술 전수보다 중요한 것은 은장도의 정신이므로, 일생 동안 장인 정신의 사명감을 지켜왔다.

장도는 177번의 공정을 거쳐야 하지만 문화재청에서 협업은 가능해도 분업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힘들다. 고도의 기술과 정신을 요구하는데 돈은 안 되니 가족이라는 사명감이 없이는 평생을 매달리기가 불가능하다.

아버지와 같이 살며 기술을 익히다보니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어‘한 생각 한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제자를 구차하게 구할 수 없고 아무나 가르칠 수 없는 점이다. 혹시 잿밥에 관심을 두고 일하면 문화재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광양 장도 박물관’을 9년째 연중 개관하여 활성화시켰지만 운영비 지원이 낮아 전국 120개 전수관 중에서 자부담을 가장 많이 한다.

박물관은 광양시의 재산인데 벌어서 운영하려니 힘들었고, 공공건물이라서 장인의 작업장과 시민의 교육 공간이 비좁았다. 다행히 올해 행정자치부 지원 사업으로 작업장과 교육관 2층을 신축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40명에 불과한 교육 공간이 100명까지 수용하도록 확대된다. 이처럼 행정에서 관심을 가져주면 문화 활동이 엄청나게 달라진다. 문화예술 공간은 언제나 열려야 하고, 같이 어울려야 한다. 장인, 행정, 시민의 3박자가 맞아야 성장한다.

작년 문화예술인으로서 선거에 발을 담근 것도 시대적 요청이었다. 문화예술인이 정치도 알고, 입법과 행정을 연결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시민들도 정치를 싫어할 것이 아니라 정치를 가르치고 배우면서 소통하는데 나서는 것이 중요함을 느꼈다.

 

 

내친 김에 활동 영역을 넓혀 중앙의 문화예술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장인이라고 일만 하면 문화정책이 정체되고 변화가 없다. 문화예술인이 전념할 수 있는 정책을 바꾸는 일에도 나가야 한다.
금은 가격으로 세상을 본다

 

 

장도는 칼날, 칼집, 칼자루, 장식의 4부분으로 나뉜다. 이 부분의 재료와 모양에 따라 이름도 여러 가지다. 재료에 따르면 금장도 은장도 옥장도, 형태에 따르면 을자도 사각도 팔각도 등이 있다.

문양에 따라 십장생도 화문도 용문도 당초문도, 기법에 따라 칠보 낙죽 상감 하각 나전칠기 등을 덧붙여 부른다.

정말 다양하다. 그래서 창작하는 재미가 솟는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에 따라 제작하면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새로운 시도는 그만큼 시간과 금전 요소의 투입이 늘어난다.

은을 재료로 많이 써서 은장도가 흔한데, 금은 값이 올라가면 금과 은으로 장식하기가 어렵다. 원재료가 귀금속이니 금은 가격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금은 값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본다.

금은 값이 내려가면 살기 좋은 세상이고 값이 뛰어오르면 서민이 살기 힘든 세상이다. 나라와 세계 경제가 평온해야 금은 값이 내려가 안정되고 시민들이 예술품을 구매할 여유가 생긴다. 요즈음처럼 은 값이 돈 당 만 원을 넘기면 작업할 수가 없다. 장도 서너 점 만들면 천 만 원의 재료비가 들어버리니까.

이렇게 칼은 대중적 보급이 어려우나 파생 상품을 개발하면 고부가 문화상품을 창출할 수 있으므로 꾸준히 연구한다. 문화상품 개발은 시민과 소통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 아이디어와 돈이 들어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은장도와 관련한 여러 소품들은 장도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아내는 칠보은장도를 디자인하고 개발하기도 했다. 현대인들이 접근하기 좋은 장신구에 장도의 전통을 새기는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다. 어쨌든 장도도 장신구였으므로.

서울 삼청동 북촌 한옥마을에“광양 은장도”란 가게를 연 지 3년. 우리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서울과 외국인들에게 장도 문화를 알리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에 가면 눈총 받지 않고 편안함을 느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공짜 협찬 요구는 어이없는 일이다. 그래도 영화“광해”에 처음 협찬을 했고 정신문화를 반영하는 대중 예술에는 접목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광양 패도’또는‘은장도’는 생활인의 장신구였다.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다용도 칼이 멋지고 기품을 더했다. 필자가 고등학생 시절에는 아버지의 은장도를 몰래 차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한 은장도가 필요 없이 편리해진 세상이라고 그 문화와 정신까지도 버리고 살고 있지는 있는지. 돌이켜보며 장도박물관과 장도장은 광양 전통문화의 산실임을 확인한다.

광양문화연구회 박두규
(전라남도청소년미래재단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