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22> 돌탑은 둘레길을 지켜주고, 둘레길은 돌탑을 이어주고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22> 돌탑은 둘레길을 지켜주고, 둘레길은 돌탑을 이어주고
  • 광양뉴스
  • 승인 2014.11.24 11:26
  • 호수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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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가꿈이 유용재 씨 -

 

 지난 봄, 오랜만에 가야산 등산에 나섰다가 둘레길 이정표를 보고 무작정 따라갔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이 이것저것 생각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던 중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바로 수십 기의 돌탑이었다. 마치 진안 마이산의 돌탑을 옮겨놓은 듯했다. 이른바‘적벽 33탑’이었다. 

 가야산 돌탑을 만나다
 33기의 탑을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본 후, 둘레길을 계속 걸었다. 
 이번에는 제법 가파른 경사지에 또 한 무더기의 돌탑이 나타났다.
 가람쉼터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까 적벽의 돌탑과 비슷한 양식이었다.
 한 사람의 작품임이 분명했다. 그냥 서 있기도 힘든 경사지에 이렇게 거대한 돌탑을 쌓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둘레길은 가람쉼터에서 옥곡면 쪽을 돌아 광영동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광영동 약수터 위쪽 큰골 넓은 뜰에 이르니 또 한 무리의 돌탑이 있었다.
‘어린이는 대한민국의 보배’,‘대한민국 남북통일 기원탑’,‘현충일 기념탑’, ‘부부 백년회로 기원탑’,‘광양시 30만 기원탑’등 만든 이의 나라사랑과 광양사랑의 마음을 담은 이름이 새겨진 돌탑들이 당당히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적벽과 가람쉼터의 돌탑과 쌓은 수법, 생김새 등이 같았다.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많은 돌탑을 쌓았을까? 필자는 대학원 시절 전공이 한국의 석탑이었기 때문에 유독 탑에 관심이 많다.
중국이 벽돌탑의 나라이고, 일본이 목탑의 나라라면,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만들어진 석탑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만 1,500여 기이다. 젊은 시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석탑들이 가야산의 돌탑 위에 중첩되어 되살아났다. 

 둘레길을 개척하다
 광양문화연구회에서 광양의 문화 인물을 소개하자고 의견을 모았을 때, 필자는 마음속으로 가야산 돌탑의 주인공을 점찍어 두었다.
 

 수소문하여 가야산 돌탑의 주인공이 유용재(57세) 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연락처를 손에 넣었다. 드디어 지난 10월 9일 돌탑의 주인공과 함께 가야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가야산 제2주차장에서 처음 만나 수인사를 나누고, 답사 일정에 관해 여쭈어 보았다. 

 “오늘 돌탑 답사 코스를 어떻게 잡는 게 좋을까요?”
 “둘레길을 따라 가야산을 한 바퀴 돌면서 돌탑을 보도록 하죠”
 “둘레길을 누가 조성했는지 모르지만, 참 잘 만든 것 같아요!”
 “3년 전에 제가 만들었습니다.”

 돌탑 주인공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는데, 둘레길 개척자까지 만나다니, 정말 행운의 날이었다.
 가야산 둘레길은 2010년 10월 10일 10시 10분 10초에 시작되어, 2011년 1월 11일 11시 11분 11초에 완공되었다.
 시청의 관계자와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둘레길 안녕 기원제’를 지냈다.
 
 유용재 님은 가야산 둘레길은 본인의 공이 아닌 아이디어를 제공한 정기 전 중마동장님의 공임을 강조하였지만, 필자가 보기엔 두 분의 합작품이었다. 그리고 금년 봄에는 가야산 등산로 주변에 2000주의 벚꽃나무를 심었다. 광양시 공원녹지사업소의 장진호 전 소장님과 오강현 현 소장님, 서희원 팀장님이 묘목 후원을 해 주셨고, 공승기 광영동장님과 박문수 중마동장님과 시민들의 일손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모든 공을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돌렸다.
 
 ‘잘되면 남의 탓’을 하는 벚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분이었다. 현재 유용재 님은 가야산에 새로운 둘레길을 조성하는 중이다.  기존의 둘레길이 중턱보다 높은 지점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산행시간도 짧은 편이어서, 조금 더 아래쪽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다. 조만간에 윗길과 아랫길이 서로 소통되면 다양하게 가야산을 즐길 수 있게 될 것 같다. 광양읍의 서산처럼 중마동의 가야산도 진정한 시민의 쉼터로 거듭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돌탑에 생명을 불어넣다
 유용재님이 가야산 1호인‘소원성취탑’을 쌓은 것은 2003년 3월 3일이었다.  이후 쉼 없이 쌓은 결과 2014년 현재 100여 기에 이른다.  지금도 쌓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쌓을 계획이다. 목표는 1,111기이다. 하루 5시간을 기준으로 작은 돌탑은 5일 정도, 큰 돌탑은 한 달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니, 그 정성과 시간이 짐작이 안 갈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어떤 계기로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나요?”
 “선친이 석공이었어요, 제방 쌓는 일을 하셨는데, 그 피가 제 몸에 흐르는 가 봐요.”
 “탑을 쌓으면서 어떤 의미를 담았나요?”
 “처음에는 개인적인 좋은 일을 기원하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돌탑의 수가 늘어나면서 개인보다는 광양과 우리나라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돌탑 쌓기의 노하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돌과 돌이 서로 의지하도록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도 독불장군이 없듯이 돌도 혼자서는 높은 탑 위에서 버틸 수가 없습니다. 서로 받쳐주고 밀어주어야만 합니다.”
 “모든 돌탑에 이름이 있네요!”
 “예, 이름을 먼저 정하고 돌탑을 쌓았습니다.”
 
 유용재 님이 탑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탑은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모든 탑에는 이름과 탄생일이 적혀있다. 특이하게도‘광양시민발전탑’에는 2008년 10월 3일과 2014년 7월 30일 두 개의 조성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공든 탑도 무너진다
 광양시민발전탑은 2008년과 2014년 같은 자리에 두 번 쌓은 것이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속담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모든 탑은 무너진다. 거센 비바람에 무너지기도 하고, 누군가가 고의로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탑은 계속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탑의 상륜부는 구조적으로 취약하여서 수시로 관리해야만 유지된다. 때로는‘광양시민발전탑’처럼 탑 전체를 해체하고 다시 쌓아야 한다.

 실제 우리나라 1,500여 개의 석탑 중 상륜부가 남아 있는 석탑은 10여 기에 불과하다.
 필자와 둘레길을 돌던 중‘광양제철소 무사고 발전탑’에 이르렀을 때, 탑의 상륜부 부분이 무너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바로 수리 작업에 들어갔다. 가방에서 꺼낸 다 헤어진 장갑을 끼고 무거운 돌을 들고 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거의 열정은 보는 필자에게 무한감동을 안겨주었다.

 이처럼 유용재님은 가야산 둘레길을 돌며 자식 같은 돌탑들을 돌본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부모도 없는 고아처럼 내버려둘 수는 없다. 가야산의 돌탑은 말 그대로 유용재님의 사랑과 정성을 먹고 산다.
 가야산 돌탑 100여 기는 그의 광양 사랑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가 말이 아닌 온몸으로 고향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야산에 돌탑을 쌓는 것을 환경 훼손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유용재님도 이러한 지적을 겸허히 수용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개인 또는 단체의 이름을 돌탑에 적어 넣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분명히 하였다. 유용재님의 광양 사랑의 순수한 마음을 담은 가야산 돌탑이 영원하길 기원한다.   
     
 광양문화연구회 이은철(광양제철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