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10>세상은 리듬이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10>세상은 리듬이다!
  • 광양뉴스
  • 승인 2014.08.25 09:23
  • 호수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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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이헌구 씨

이순(耳順)에 이른 이헌구씨는 광영동에서 조그마한 음악카페를 운영하는 기타리스트다. 한 때는 전국에서도 잘 나가는 기타리스트였다. 특히‘캄보나 FULL’에서 귀하게 ‘모셔가는 분’이었다.

어느 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각박한 현실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과감히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일면식도 없는 광양시 진상면 금촌리 상금마을로 찾아들었다. 친여동생의 시댁이 진상면이라는 인연뿐이었다. 귀농이었다. 그때가 2001년 무렵이었다.

백운산과 섬진강, 남해 바다와 같은 자연이 좋고, 광양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한 동안 음악을 멀리 했지만, 사연이 생겨 다시 짊어져야 했다. 숙명이란다. 이제는  여생을 음악으로 살아가겠단다. 그리 결정하니 음악과 함께하는 나날이 행복하단다. 그래서 음악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본다.

“음악에는 위대한 힘이 있지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잖아요? 전한의 명장 한신이 강력한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칠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은 초나라의 슬픈 노래에서 나왔지요.”

치열한 전투현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지만, 정말 대단한 힘을 발휘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경제부흥을 도모했던‘새마을 운동’ 시절‘새마을 노래’가 온 국민들의 혼을 홀라당 빼앗고 말았다.

꼭두새벽부터 온 마을에 메아리 친 그 노래야말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한 때 세계사를 주름잡던 나폴레옹, 스탈린, 모택동, 히틀러도 음악의 힘을 이용하여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내가 이리 멀쩡하게 지내고 있는 것도 다 이 음악 때문이지요!”

지난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언어장애와 왼쪽 마비증상까지 나타났다. 한 달 만에 퇴원하여 통원 치료를 받는데 후유증이 의외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게 다 기타와 음악 덕분이었다.

불편한 몸이지만, 부인과 함께 운영하는 음악카페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매일 3~4시간씩 이어지는 음악 활동이 물리치료보다 더 좋은 치료로 작용한 것 같다며 의사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때 하우스를 경영하며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와 같은 자연음악을 식물들에게 들려주어 보았다. 들려주지 않은 식물에 비해 소출이 더 많았다. 음악은 그런 것이란다.

“이러한 음악의 위대한 힘 중에서도 저는 치유의 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지요!”기타리스트 이헌구씨는 음악이 단지 기분을 전환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차원을 넘어서 마음과 육체의 병까지 치료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병들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간다. 귀농 이듬해에 광양복지관 중증장애인(휠체어 장애) 실용음악 봉사선생님으로 선발 1년간 가르쳐 연말에 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우리 중증장애인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진한 감동의 물결이 울음바다를 만들었다. 다음 날 다음카페는 격려의 말로 도배되었으며, 송구스럽게도 감사패까지 받게 되었다.

음악봉사야말로 살아가는 가장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주 활동무대는 광영성당이다. 악단을 조직하여 각종 행사에서 연주도 하지만, 양로원과 같은 소외계층을 찾아다닌다.

광양시 다문화센터와도 교류하고 있다. 음악이 세계 공통언어라는 것을 다문화 가족들과 함께하다보면 금세 느낄 수 있다. 음악이 이방인들을 보다 쉽게 맺어주는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 기타를 배우고 싶어 하거나 자기처럼 뮤지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음악 공부를 하고 있다. 이들과 매주 함께하는 시간이 매우 의미 있는 활동이 되고 있단다. 지음의 관계들이어서 그럴까? 고수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세계의 만족감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광양으로 흘러들어 온 지가 벌써 13년 쯤 되어가네요!”

부부는 이웃 사람들의 귀동냥으로 덜컥 2000평짜리 하우스를 시작했다.‘농사 농’자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어찌 고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웃들의 도움이 컸다. 그러던 중 2003년 9월 태풍‘매미’에게 맹타를 맞고 말았다. 타격은 엄청 컸다.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2005년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순천 성가롤로병원을 거쳐 광주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곧 뇌 절개수술을 받고 한 동안 입원하였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일을 시작했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2009년 마침내 접고 말았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다시 기타를 손에 들기로 했다. 광영동에 조그마한 2층 홀을 얻어 음악카페를 시작하였다. 그런 중에 앞에서 말한 뇌졸증의 충격을 겪었지만, 그래도 다시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단다.

“모친이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이씨의 고향은 전라북도 익산이다. 부친께서 군관 군번 8번의 직업군인(6·25전과 월남전 참전 유공자)이었던 관계로 한 때는 강원도 양구에서도 살았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부산에 터 잡고 살았다.

기타를 잡게 된 이유는 모친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형을 제외하고는 형제들에게 음악활동을 시키셨다. 부산 KBS라디오 방송국 성우였던 누나를 비롯하여 동생들까지 그 시절 방송국 합창부원이었다. 이씨도 5학년 때 모친의 손에 이끌려‘월광음악학원’에서 기타를 잡게 되었다.

예술 집안의 피라고나 할까 끼라고나 할까. 이씨의 장남 이희백씨 부부는 세계적인 라틴댄서이다. 한 때 LA인터내셔널 살사대회에서 제일 큰 상을 받았으며, 그 해 세계 살사댄서 탑10에 들어갔다. 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초청받아 공연 다니고 있으며, 현재 제주 게스트 하우스에서 ‘라틴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올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제주도 함덕해수욕장에서 국제적인 라틴페스티발인 ‘제3회 제주비치살사페스티발 경연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카페 한켠에 아들 부부의 열정적이고 화려한 춤 솜씨가 잘 드러난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라틴댄스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드러낼 수 있는 달인의 경지에 이른 춤사위다. 가끔씩 들어다보는 것도 큰 낙이란다. 이씨의 기타 솜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제법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학교 축제 행사 때면 매번 주빈이 되었다. 악단까지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군대생활로까지 이어졌다. 11사단 문선대에서 군악대로, ‘보리울’이라는 합창단으로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제대 후 처음으로 몸을 담은 곳은 부산 태종대‘곤포의 집’이었다. 이어서 TBC방송국 김경호 악단에 들어갔다. 서영춘의 동생 서영수가 사회를 보는 전국노래자랑 대회 악단이 되었다.

대구에서 ‘삼태기메들리’의 주인공 가수 고 강병철과 함께 대구 중앙통 음악클럽에서 한 2년 동안 활동했다. ‘야생화’를 부른 가수 ‘라수빈’도 함께했다. 대구 봉덕동의 미8군 쇼밴드에서도 활동했으며, 제주 칼호텔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충북 청주시에서 활동할 때 이효순씨를 만나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2남을 두게 되었다.

“대중음악에 대해서는 여러 아쉬운 점이 많지요.”

70년대 80년대 통기타 음악은 순수한 인간의 노력만으로 만들어낸 자연음악이었다면 요즘의 음악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기계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이 인간적인 감성에 호소하기 보다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락의 음악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음악의 순수성을 사라지고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포풀리즘이 전반적으로 자리하게 되어 마냥 안타까울 뿐이란다.

이씨는 마냥 기타만 치는 기타리스트만이 아니다. 자작곡도 가지고 있다. 아직 세상에 내놓지는 않았지만, 지인들끼리 모이면 즐겨 들려주곤 한다. 특히 광양에 와서 진상에 있는‘농부네 텃밭도서관’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물론 타 지역의 다양한 문화예술 인물들을 만나게 되었다.

광양미술협회원과 당진미술협회원들의 교류에서 음악을 들려주었는가 하면, 광양에서 활동하는‘시·울림문학동인’들과 자주 어울리며 그 시인들의 시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얼마 전에 시인들 몇 분이 오셨더라구요. 그 때 두어 곡을 불러드렸지요. 매우 좋아하시더라구요.”작곡한 음악을 지인들과 함께 연주하며 즐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단다.

음악을  명예나 부귀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스스로 자족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모습이 아름답다. 가까운 이웃들과 따뜻한 음악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그의 음악 인생에서 싹 터 자란 열매가 아닐까 싶다.

가장 최근에 지은 곡으로는 세월호 사고와 관련한 ‘그리움’ 이라는 곡이란다. 조금 듣고 싶었지만, 아무 때나 연주해 달라는 것이 당연히 실례일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더 많은 연주 기회를 갖고 싶단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매월 셋째 주 수요일을 문화의 날로 정하고 각 지역마다 나름의 문화 행사를 꾸리도록 권하고 있는데, 광양에서는 대규모 공연을 할 모양이란다. 그 공연에 함께 참여하여 주민들과 어울리고 싶단다.

“음악을 하다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리듬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밤과 낮, 비와 눈, 높은 곳과 낮은 곳, 해와 달, 바람소리는 물론이요, 빗소리, 새소리, 파도소리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리듬이 담겨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모든 동물들의 심장소리와 숨소리 또한 리듬이었다. 심지어 식물들의 자람에도 리듬이 있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리듬을 타고 즐기면 자연스럽게 잘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이를 어기면 탈이 난단다.

맞는 말이다. 심장이 제 리듬을 타지 못하거나 요장육보가 제 리듬에서 이탈되면 병을 얻게 되는 것이요, 식물이 제 리듬에서 벗어난 성장을 하게 되면 그 또한 이상이 생길 것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러하단다. 삶 자체가 리듬이다. 파도의 너울처럼 상승곡선의 리듬을 타는가 하면 하강곡선의 리듬을 타기도 한다.

상승국면이라 하여 영원하지도 않을 것이며, 하향국면이라 하여 그 또한 영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상승국면에서는 하강국면을 생각하고 하강국면에서는 언젠가는 다시 상승국면으로 돌아설 것을 기다리는 인내와 준비가 필요하리라.

이씨와 헤어져 음악카페 계단을 내려오는데 문득 화두 하나가 번쩍 뇌리를 쳤다. “세상은 리듬이다!”
/글, 사진 박행신 광양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