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8>광양에 ‘예술문화’의 뿌리를 내리다...유 진 광양예총 초대회장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8>광양에 ‘예술문화’의 뿌리를 내리다...유 진 광양예총 초대회장
  • 광양뉴스
  • 승인 2014.08.01 21:15
  • 호수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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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제철소의 설립과 광양의 예술문화

 


20여 년 전 광양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광양을 생각하면 늘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어려서부터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의 성향 탓이었을까? 우리 시가 타 시·군에 비하여 빈약한 문화재와 예술문화에 대해 목마름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광양제철소 설립에 따른 도시화로 인하여 이러한 목마름이 해갈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지역에‘예술문화’라는 단어가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철소 설립 이전부터 향교나 문화원을 통해 문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던, 몇몇 지역민들을 제외한 시민 대부분의 현실이었다.  

광양예총의 탄생

광양은 지리적으로“南水北山東川(남쪽엔 광양만, 북쪽엔 백운산, 동쪽엔 섬진강)”이라는 천혜의 형국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가 광양을 지나며 남긴“朝鮮之全羅, 全羅之光陽(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전라도요, 전라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광양이라.)”는 유명한 어록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만큼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인심이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누구나 터전을 잡고 살기에 알맞다는 말이다. 광양제철소가 설립되면서 토착민 위주로 살아왔던 광양에는 외부 인구들이 상당 수 유입되었으며, 그로 인한 문화적 혼란이 적지 않게 발생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의 아름다움과 유연성은 이를 어느 정도 극복하는 데에 교량적 역할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예술은 시민 서로 간의 교감을 이루게 하고, 스스로의 정체성 환기와 새로운 경험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의 방향을 추구하는데 윤활유가 되었다. 현재 광양에 거주하는 여성들 중에는 광양예총의 설립과 함께 시작했던 문학ㆍ미술ㆍ음악 등 취미 생활이 본업으로 발전된 경우들을 더러 볼 수 있다.

 

 


이는 필자가 회장직을 맡아 이끌어가고 있는‘광양여성작가회(서양화)’회원 중에서도  방과 후 활동이나 봉사 활동 등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는 경우들에서 확인된다. 광양예총은 1992년 9월 25일‘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광양지부(약칭:광양예총)’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이는 당시 예술의 불모지인 광양에 초대회장인 유진 화백과 김선영 화백의 노력으로 어렵사리 꾸려졌다.

광양예총이 설립된 후 정상적인 궤도에 이르기까지는 이들의 무수한 인내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예술문화인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권익을 옹호하며, 민족예술의 국제적인 교류와 나아가 인류 예술문화 발전 및 창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기치로, 문학ㆍ미술ㆍ사진ㆍ음악협회의 발족과 함께, 광양예총은 명실공이 예술단체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현재 광양예총은 국악ㆍ문인ㆍ미술ㆍ사진ㆍ연극ㆍ연예ㆍ음악 등 7개 지부에 총 5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광양의 예술문화 발전에 많은 업적을 쌓고 있다. 광양예총은 매년 연극제와 축제 행사 등 다양한 예술문화 행사로 지역민들의 정서함양과 자긍심 고취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예총의 설립 당시 목적에 부응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각 지부들의 활동은 지역민들에게 귀감이 되어오고 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교육의 일환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서양화가이자 기업가, 광양 예술문화와 경제 발전에 이바지

유진 회장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93년 필자가 그림을 시작한 후 첫 전시회를 개최할 때였다. 그는 축사를 통해 광양의 예술문화 발전을 위해 꾸준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달라는 격려를 했다. 아울러 자신도 서양화가로서 창작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광양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자신이 했던 그 때의 약속을 지켜나갔다.
 


광양예총은 초기에 광양시의 예술에 대한 이해부족 및 예산상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보조금 때문에 난항을 맞게 되었다. 그 때, 사무국장(김선영 화백)과 함께 의회를 찾아가“제가 몸담고 있는 한진그룹에서 광양시에 세금을 충분하게 내겠습니다. 대신 광양예총에 예산을 지원해주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의 제안을 광양시에서 수락하게 되었으며, 그 일이 토대가 되어 현재까지 광양예총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유진 회장은 그때 (주)한진 호남본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한진에서 사용하던 모든 중장비와 선박이 포항시에 등록되어 있어 세금도 당연하게 포항시로 내던 터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유진 회장은 이 같은 제안을 통해 광양시는 세수를 확보하고, 예총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 일은 당시 필자의 둘째 오빠가 시의원 시절에 있었던 일화로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는 사실이다. 유진 회장은 곧 본사에 이 내용을 상신하여 한진 호남본부에서 실제 사용하는 T/R, 도자, 선박 등을 광양시로 이전 등록하였다. 따라서 광양예총 지원금 몇 배의 세수를 광양시에 납부하게 되었으며 지역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한편, 광양시가 오스트리아 린츠시와의 자매결연 때에, 광양시 작가 대표로 작품을 기증해달라는 시 관계자의 요청이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린츠 시장 사무실에 광양전경을 담은 작품을 기증하였다. 귀국 후에도 스위스 한국 대사관을 새롭게 개축했을 때, 린츠시를 전경으로 한 20호 작품을 기증하였으며, 광양시장실에도 린츠시 전경을 담은 작품을 기증하여 지금도 부착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광양의 초대 예총회장으로서, 광양의 경제와 예술 발전을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는 사실만은 필자를 포함해 광양시민들이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업가로 광양시에 남다

유진 회장은 2004년 (주)한진에서 호남지역본부장(상무) 직을 끝으로 정년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는 광양을 떠나지 않고 광양예총 산하단체인 광양미협의 회원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주)시온 이 엔지 회장직을 맡아 왕성한 경제활동도 겸하고 있다. 광양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면 광양예총 회장 유진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이다.

그만큼 예술과 경제 분야에 많은 기여를 해왔으며, 본인의 창작 활동은 물론, 지역 후배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왔다. 그는 12년이란 긴 세월 동안 광양예총 회장직을 맡아 예술의 불모니 광양에 예술이라는 씨를 뿌렸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필자는 5년여 동안 예총 사무국장직을 맡아 함께 일했던 적이 있다. 가까이서 본 그는 평소에 거침없이 농담도 잘 하고 활달한 성품의 소유자이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무척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보였다. 누구나 앞장서 단체를 이끌다보면 본의 아니게 적대감도 사게 되고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유진 회장은 최소한 비겁하지도 겁쟁이도 아니었다. 그는 늘 객관적이었으며 사리분별이 명확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광양에 남아 서양화가로, 그리고 CEO로 인정받으며 살고 있는 그를 우리는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한다.

삭막한 광양에 예술이라는 혼을 불어넣어 예술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서양화가로, 그리고 광양시에 경제적 한 부분을 책임졌던 훌륭한 CEO로 우리의 뇌리에 머물기를 기대해본다.

 

 

 

 

 

유진 회장 주요경력 및 수상

•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 광양예총 초대회장(1대~4대)
• (주) 한진호남지역본부장(상무)
• 문화공보부장관상ㆍ재무부장관상ㆍ전남문화상ㆍ전남예술인상ㆍ광양예술인상 등
• 한국미협(자문위원), (사)목우회·신작전·무진회·조미회 운영위원
• 현재) 광양미협 고문, 전남도지사 정책자문위원, (주)시온 이엔지 회장 

백숙아 (광양문화연구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