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식음료아카데미 로스뱅 강사
누구나 커피에 대한 작은 추억이나 이야깃거리들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 몰래 커피를 마셨던 일, 학창시절 쉬는 시간에 몰려오는 잠을 잊기 위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던 일, 혹은 카페에 처음 갔던 날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는 말로 가득한 메뉴판을 보며 당황했던 일 같은 것들 말이다. 필자도 요즘은 예가체프니 케냐 AA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처음으로 갔던 카페에서의 일은 지금도 웃지 못 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저렴한 가격과 그럴싸한 이름에 혹 해서 시켰던 에스프레소는 여러모로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작은 잔과 양도 양이지만 무엇보다 처음 입에 가져다 댔을 때의 진한 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친구 앞에서 자존심에 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한 번에 마셔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사실 에스프레소라는 커피를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 맛을 쓴 맛 만으로 규정지어버린다. 과거에 필자 역시 그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스프레소는 쓴 맛만으로 정의되기에는 아쉬운 점이 너무 많은 커피이다. 다른 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매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를 받으면 작은 잔을 가득 채운 황금빛의 크레마를 먼저 확인할 수 있다.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적으면 신선하지 못하다거나, 너무 짙거나 옅으면 추출이 잘 된 것이 아니라는 것 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크레마는 커피빈의 지방성분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향을 가득 머금고 있는데, 잘 맡아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커피의 향 이외에도 꽃이나 과일, 허브계열의 향들을 느껴 볼 수 있다. 거기에 부드럽고 상쾌한 느낌, 고소하고 단 맛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에스프레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입에 한 모금 머금게 되면 살짝 단맛이 스쳐지나가며 커피가 입안 가득한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른 커피에서 마셨을 때의 찰랑찰랑한 느낌과는 다른 묵직한 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을 바디감이라고 한다. 이 바디감을 느끼기 위해 에스프레소를 찾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앞에서 말했듯 에스프레소하면 쓴 맛을 생각하게 되는데, 신맛 역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이 두 맛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야 좋은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커피에서 신맛이 난다고 하면 많이들 의아해 한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커피빈은 많은 산성분을 가지고 있다. 원두 자체가 신 맛을 특징으로 가진 것들도 있지만, 에스프레소 추출 과정에서 물의 압력, 온도, 커피가루 입자의 크기, 탬핑의 정도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신맛과 쓴맛의 정도가 달라진다. 조화를 이루며 상쾌하게 입안에 감돌다 깨끗하게 사라지는 신 맛과 쓴 맛은 에스프레소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처음 만난 날부터 마음이 맞아 친해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래 만나면 만날수록 그 진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에스프레소도 그러한 것 같다. 처음엔 강렬한 쓴 맛으로 우리를 반기지만 점점 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매력적인 향과 깨끗한 신 맛과 다른 커피에선 느끼기 힘든 크레마와 바디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겨울엔 작지만 매력 있는 이 친구와 친해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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