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은 위정척사 계열의 유생과 동학 농민 운동을 계승한 농민들이 총칼로써 나라를 지키고자한 항일 구국 운동이었다. “나라는 망해도 의병은 망하지 않는다.”는 박은식의 표현처럼, 나라의 위기 정도가 심해질수록 의병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유생 의병장 중심의 의병이, 1905년 을사늑약에 이르러서는 평민 의병장까지 가세하여 그 기세가 한층 강해졌다.
의병, 상투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다
1895년 11월 15일(음력), 단발령이 내려졌다. 친일파와 일제가 궁성 주위에 대포를 설치하고 단발을 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고종과 세자의 두발을 강제로 깎았다. 이어 칼을 찬 순검들을 동원하여 길을 막고 지나는 사람마다 단발을 실시하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성들의 상투를 잘랐다.『매천야록』에는 이때부터 의병이 봉기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주 관찰사 이종원이 금강 나루를 가로막고 행인들의 머리를 강제로 삭발하여, 길가에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끊겼다. 이때부터 온 나라가 물 끓듯 하고, 의병이 사방에서 봉기했다. 서상열은 강원도에서 일어나고, 유인석은 경기도에서 일어나고, …… 정한용은 진주에서 일어나니, 원근에서 호응하였다.
단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을미의병에 대한 기록이다. 매천은 조선의 전통적 가치를 상징하는 ‘상투’를 지키고자 일어난 의병들을 ‘충의에 뜻을 품은 자들’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일반적으로 을미의병의 원인으로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같은 비중으로 얘기하지만, 매천이 판단하기에는 을미사변은 영향력이 미미하였고 단발령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즉 을미의병의 충의의 대상은 권력이 아닌 전통이었다.
대개 의병을 일으킨 자들은 단발령을 구실로 삼고 있었으므로, 박정양은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김홍집 등이 취한 조처를 돌이키는 데 힘써 드디어 단발령을 폐지하고 백성들의 소망을 따랐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병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정국을 바꾸고자 함이었다. 백성들은 자신의 상투를 가리키며 “이는 의병들의 힘이다.”라고 하는데, 어찌 그러했을 것인가?
아관파천 이후 고종과 박정양 친러내각이 단발령을 철회하였다. 당시 백성들은 이것이 의병 항쟁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으나, 매천의 생각은 달랐다. 이는 친러파가 백성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친일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술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매천이 단순히 감상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내면의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아무튼 단발령이 철회됨으로써 양반 유생 의병장이 이끈 을미의병은 대부분 스스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부 동학농민군 출신의 평민 의병들은 해산하지 않고 활빈당(活貧黨)의 이름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매천은 이들을 약탈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도(盜, 도적떼) 혹은 토비(土匪)라 부르며 의병들과 구분하였다. 매천은 단발령이 철회된 마당에 계속 의병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겁약에 항거하여 가마솥에 물 끓듯 봉기하다
매천의 생각대로 을미의병은 단발령이 철회됨으로써 곧 해산되었다. 그러나 10년 뒤,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일어난 을사의병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대되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외교권의 박탈로 사실상 국권을 강탈당한 상황에서 일어난 의병인지라 그 충의가 대단하였다. 매천도 을사의병부터 의병에 관한 기록에 더욱 적극성을 보였다.
경기·강원·충청·경상 등 여러 도에서 의병이 크게 봉기했다. 겁약(劫約, 을사늑약) 을 맺은 이래 나라 전체가 가마솥에 물이 펄펄 끓듯 들끓어 깃발을 세우고 저마다 왜놈들을 죽이자고 떠들었다. 관동 지방에서 먼저 봉기하더니 곳곳에서 향응하여 인심이 제법 모였으나, 병기도 부족하고 기율도 없어 비록 백 명, 천 명으로 무리를 이루었더라도 일본군 수십 명에게 번번이 패해 무너지고 말았다.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였으나, 잘 훈련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 참판 민종식이 이끈 의병은 충남 홍주에서, 전 참판 최익현이 이끈 의병은 전북 태인에서 봉기하였으나, 이들 유생 의병장이 이끈 의병 부대들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포위당하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못한 채 의병항쟁을 끝내고 말았다.
특히 최익현의 경우 관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자 ‘왕이 보낸 군대와 싸울 수 없다’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스스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유교적인 ‘충(忠)’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반 유생 의병장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이 과정을 지켜본 백성들의 절규는 충신으로서의 최익현의 명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최익현)가 패배하자 기생이나 거지까지도 모두들 목 놓아 탄식했으며, 백정과 무당까지도 그가 탄 가마를 바라보며 길을 막고 절하며, 하늘을 향해 “우리 최충신을 살려 주십사.”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서울로 압송된 최익현은 일본군 사령부에서 두 달을 보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악랄한 일본군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최익현을 바로 죽일 수는 없어, 3년 감금형을 선고하고 쓰시마(對馬島)로 끌고 갔다. 1906년 7월 8일(음력) 이었다.
최익현, 대마도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다
일반적으로 대마도에 도착한 최익현은 “일본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여 음식을 거부하던 끝에 11월 17일(음력) 굶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익현은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7월부터 11월까지 무려 4개월 동안 단식 투쟁을 하다 생을 마감한 셈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매천야록』에 기록된 최익현의 죽음 과정을 보면 의혹이 풀린다.
11월 17일, 전 판서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졸(卒)하였다. 최익현이 처음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 땅에서 난 좁쌀로 지은 죽이 제공되었는데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일본인은 크게 놀라 우리 정부에 연락하여 조선의 음식물을 공급받아 제공하였다.
임병찬 등이 거듭 권하였으나, 연로한 데다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먹는 것이 점차 줄어 병이 더욱 깊어졌다. 여기에다 곱사등이 병이 겹쳐 10월 16일(음력) 자리에 눕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 이때 나이 74세였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