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박물관에 들어서면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모습으로 힘차게 화사석을 떠받들고 있는 석등하나를 만나게 된다.
불전 앞에 등불을 안치하는 석조물로 부처님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석등.
불교에서는 공양 중의 으뜸으로 여겼던 것이 등불을 밝히는 것이라 한다.
등불을 밝힌다함은 부처님의 진리로 세상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 의미를 넘어 박물관 입구에서 만나는 중흥사지 쌍사자석등은 또 다른 경외를 갖게 한다. 강한 화강암을 쪼개고 다듬어 연꽃과 사자를 만들고 화사석과 지붕돌을 얹히는 그 과정에서 석공이 흘렸을 땀과 정성이 결코 가볍지 않아 천년의 세월을 이기고도 이렇게 당당하다.
만만치 않은 세월과 그것을 조상한 자의 염원을 담아 아직까지도 생생한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중흥사지 쌍사자석등.
세상의 처음과 끝을 의미한다는 ‘아’와 ‘흠’을 표현하고 있는 각기 다른 사자의 입모양과 서로 다른 갈기, 그리고 힘줄까지도 표현된 사자다리에서 사자의 용맹성과 위용으로 불법을 수호하고자 했던 종교적 염원보다 더 깊은 절대적 긍정의 세계가 느껴진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는 쌍사자석등은 대부분의 석등이 8각의 기둥으로 이뤄진 일반적 석등과는 다른 품격을 지닌 것이기에 더욱 새롭다.
그런데 광주박물관을 지키고 서 있는 이 석등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이 석등이 원래 있었던 자리는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안의 옛 절터다. 중흥산성 3층 석탑과 함께 불법을 수호하고 있었던 이 석등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우여곡절이 참 많다.
1930년 옥룡보통학교 후원회가 재원을 마련키 위해 일본인에게 팔려고 했으나 고적법에 저촉된다하여 팔지 못하고 토지 소유자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700원에 일본인 오쿠라에게 매각하게 된다.
이에 광양군에서 압수하여 광양군 읍내에 임시 보관한 후 1932년 조선총독부가 구입하여 경복궁 자경전 앞으로 옮기고 1935년부터 보물183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게 된다.
1960년에는 경무대 정원에서 덕수궁 국립박물관 전시실로, 다시 1972년에는 경복궁 국립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졌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국립광주박물관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느 역사학자는 유물의 존엄성은 곧 그 국가의 존엄성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 석등이 원래부터 있었던 지역에서 이토록 험난한 과정을 거쳐 아직도 본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지역의 존엄성은 무엇인가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재는 조상들이 남긴 유산으로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중흥사지 쌍사자석등은 저 먼 옛날, 통일신라시대부터 그것을 지키고 가꾸어온 일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광양인들의 정성과 애환, 숨결이 배어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우리지역 수많은 사람들의 바람과 희망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그리고 세대와 세대 간을 연결하는 상징으로 오롯이 그 자리에 빛을 발하고 있어야할 우리의 자존이 정처 없는 타향 땅을 헤매다 고향을 목전에 두고 돌아갈 날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품격 있는 도시를 만들겠다며 많은 정책들이 구상되고 추진되고 있다.
품격 있는 도시를 만드는데 지난 역사적 자원을 망각하고 성공하는 예는 거의 없다. 우리가 가진 우리의 자긍심을 일깨워내고 그것 위에 세계를 품어야한다.
국보 103호, 중흥사지 쌍사자석등이 있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돌려지는 날을 기대해본다.